제1장
“우리 한동안 못 했잖아…….”
남자의 얇은 입술이 조서연의 귓가에 닿았다. 낮고 잠긴 목소리에는 유혹이 가득했다.
“도현 씨, 나 병원 가봐야 해요…….”
조서연은 따라붙는 그의 입술을 피했다.
“한 번만!”
시간은 무한정 늘어지는 것 같았다.
조서연이 거의 기절할 것 같다고 느낄 때쯤에야 남자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아팠어?” 귓가에 남자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따 사람 시켜서 신상 가방 하나 사줄게.”
조서연은 천천히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잘생겼다. 이목구비는 경이로울 정도로 완벽했고, 분위기는 차갑고 오만했다. 막 정사를 끝낸 탓인지,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에는 아직 정욕의 흔적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결혼 3년 차, 조서연은 그가 방금 전 꽤 만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나 통이 큰 것이리라.
조서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잊었나 본데, 나 아직 감옥에 있어요.”
“그럼 출소하고 나서 메.”
조서연의 심장이 날카롭게 찔리는 듯했다.
그는 마치 그녀가 감옥에 있는 것이 휴가를 떠난 것쯤으로 여기는 듯, 너무나 가볍고 무심하게 말했다.
“곧 출소하잖아?” 남자의 손이 달래듯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스쳤다. “내가 전부터 말했지, 1년은 금방이라고.”
조서연은 눈물을 꾹 참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목소리는 바싹 마르고 거칠었다. “병원에서 외할머니가 좀 편찮으시다고 연락 왔어요. 혹시 이따 시간 괜찮아요? 같이 병원에 할머니 뵈러 가요.”
그녀는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라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었다.
다행히 모범수로 지낸 덕에 하루짜리 귀휴를 받을 수 있었다.
아침 일찍 교도소를 나와 곧장 병원으로 가려 했지만, 외할머니가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걱정하실까 봐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렀다. 그러다 해외 출장에서 막 돌아온 이도현과 마주친 것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가는 길이 급했지만, 남자는 끈질기게 관계를 요구하며 그녀를 붙잡았고, 오전 시간을 꼬박 허비하고 말았다.
조서연은 그를 만난 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함께 병원에 가면 외할머니가 그를 보고 분명 기뻐하실 테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매정하게 자신의 손을 빼냈다.
조서연의 마음 한구석이 까닭 없이 텅 비어 버렸다.
“오후에 일이 있어서, 혼자 가.” 이도현은 몸을 일으켜 침대 협탁 서랍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외할머니 드실 거라도 좀 사 드려.”
조서연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가 돈으로 자신을 때운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할머니에게 필요한 것이 돈이 아니라, 젊은 부부가 서로 아끼며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도현은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자마자 집을 나섰다. 간다는 인사 한마디조차 없었다.
조서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간단히 추슬렀다. 바닥에 발을 디딜 때, 두 다리가 여전히 후들거렸다.
그녀는 만두를 좀 빚어 외할머니께 끓여드릴 생각으로 챙겨서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선 순간, 조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손에 들고 있던 봉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몸이 약해 늘 입원해 계셨지만, 지금처럼 산소호흡기까지 달고 계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조서연은 앞으로 달려가 다급하게 할머니를 불렀다. “외할머니, 저 왔어요. 눈 좀 떠서 저 좀 보세요, 할머니!”
외할머니는 힘겹게 눈을 떴다. 늙고 생기 없던 눈에 희미한 빛이 어렸다. “서연아, 왔구나…….”
“외할머니, 어떻게 된 거예요?” 조서연이 황급히 물었다. “간호사님은 전화로 그냥 좀 불편해서 제가 보고 싶으신 거라고만 하셨잖아요. 어쩌다 이렇게 심해지셨어요!”
“네가 놀랄까 봐 간호사한테 그렇게 말해달라고 했다. 서연아, 할미는 이제 가망이 없어.”
“아니에요!”
조서연은 서둘러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맥을 짚었다.
등잔의 기름이 다 타버린 듯, 임종이 머지않았다.
눈물이 터진 둑처럼 쏟아져 나왔다. 조서연의 마음은 칼로 베는 듯했다.
“서연아,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건 당연한 이치야. 울지 마라.” 외할머니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할미는 너처럼 효심 깊은 외손녀를 둬서 이 생에 여한이 없다. 다만 네가 마음에 걸릴 뿐이야.”
“외할머니, 가지 마세요!” 조서연은 얼굴의 눈물을 마구 닦아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제 한 달만 있으면 저 출소해요. 그럼 매일 할머니 곁에 있을게요. 시골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잖아요. 병 나으시면 우리 같이 돌아가요…….”
“그래.” 외할머니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현이도 같이 가자고 하렴. 너희 둘이 나한테 예쁜 외증손주 하나 낳아주고.”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조서연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거예요. 도현 씨도 원래 할머니 뵈러 오려고 했는데, 그룹에 갑자기 급한 일이 터져서요.”
“일이 중요하지.”
외할머니는 베개 밑에서 반원 모양의 옥패 하나를 꺼내 조서연의 손에 쥐여주었다.
위에는 봉황이 조각되어 있었고, 옥의 질감은 섬세하고 촉감은 따뜻했다. 보기 드문 최상품이었다.
“서연아, 이거 꼭 잘 간수해야 한다. 이건 네…….”
외할머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된 짙은 색 정장을 입은 이도현은 길고 곧게 뻗은 몸과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 긴 다리의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그는 걸어 다니는 마네킹 같았고, 몸짓 하나하나에 타고난 고귀함이 흘렀다.
조서연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외할머니, 도현 씨 왔어요. 도현 씨가 할머니 뵈러 왔어요!”
이도현은 침대 곁으로 다가왔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언제나 냉정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지금은 어딘가 긴장하고 불안해 보였다. “조서연, 설아가 아파. 당장 가서 수혈해야 해.”
조서연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는 이도현이 외할머니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윤설아 때문일 줄이야!
하긴, 이 세상에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인 윤설아였다. 그 누구도 그녀와 비교할 수 없었다.
조서연은 가슴을 짓누르는 둔통을 억지로 참으며 목멘 소리로 말했다. “외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요. 저 여기서 할머니 곁에 있어야 해요. 도현 씨, 설아 씨는 혈액은행 피를 쓰게 하면 안 될까요?”
“Rh- 혈액형은 원래 희귀한 데다 이 병원엔 없어. 가장 가까운 혈액은행도 여기서 한 시간 넘게 걸려. 피가 도착할 때쯤이면 사람 죽어.” 이도현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끌었다. “조서연,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 넌 반드시 가야 해!”
“전 외할머니 곁에 있을 거예요! 이거 놔요!” 조서연은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서연아…… 서연아!” 침상에 누운 외할머니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네 출생에 관해서 할미가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는데, 사실 너는…….”
“외할머니!”
조서연은 병실 밖으로 끌려 나와 곧장 수혈실로 내몰렸다.
정상적인 헌혈은 400ml를 넘어서는 안 되지만, 이도현은 윤설아에게 부족하다며 사람을 시켜 800ml를 뽑게 했다.
피를 다 뽑고 나자, 조서연의 얼굴은 이미 종잇장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그녀는 허약한 몸을 억지로 지탱하며 벽을 짚고 외할머니의 병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작동을 멈춘 산소호흡기와, 깡마른 외할머니의 몸을 덮고 있는 하얀 천이었다.
조서연의 눈앞이 빙글 돌며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울 기력조차 없이, 힘겹게 외할머니를 향해 기어갔다.
“안 돼요……. 외할머니……. 제발 저를 떠나지 마세요…….”
그녀는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외할머니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죽을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조서연, 명복을 빌지.”
등 뒤에서 이도현의 낮고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리고 설아는 위험한 고비를 넘겼어. 수고했다……. 또, 교도소에서 연락 왔는데,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하더군.”
